AD, 1680년 남인의 영수인 허적은 자신의 조부가 시호를 받게되자 가문의 경사로 여겨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조정의 고관들이 참석하는 이 연회는 허적의 집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하필 이 날 큰 비가 오고 말았다. 이에 숙종은 허적을 배려하기 위해 군사용 방수 천막인 유악을 허적에게 빌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얼마 후 숙종의 명을 행하려던 승지가 돌아와서는 이미 허적이 유악을 꺼내어 썼다는 것이다. 유악은 군사용품으로 왕의 허락이 없으면 쓸 수 없는 물건이었는데 그것을 허적이 자신이 권세만 믿고 마음대로 꺼내서 써 버렸다는 것에 숙종은 진노하게 되었다. 곧 바로 숙종은 남인들을 병권에서 제외시켜 버렸고, 승지와 대간을 서인들로 대거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이로써 집권 세력이 순식간에 남인에서 서인으로 뒤바뀌었으니 이것이 경신환국이었다.
[출처:서울시립마포노인종합복지관 역사교육(강사; 김영준), 2019, 8, 22]
22세 허적(積) [1616년(광해군 2)~1680년(숙종 6)] 자(字)는 여차(汝車)이고 호는 묵재(默齋) 또는 휴옹(休翁)이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영의정은 좌의정 우의정과 함께 의정부(議政府)의 수장으로 임금을 도와 국정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총괄했다.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다 할 수 있다.
숙종 6(1680년) 공(公)의 할아버지인 한천공 허잠(潛)의 시호(諡號)를 받게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유幄:왕실에서 사용하는 천막으로 기름을 발라 비가 새지 않도록 했다)을 임금의 허가 없이 사용했다 하여 숙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공(公)의 서자(庶子)인 허견(堅)의 역모(逆謀)사건에 휘말려 삭탈관직은 물론 재산이 적몰(籍沒: 재산을 몰수 당함)되는 한편 고향인 충주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하며 허적(積)을 비롯한 많은 남인(南人)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경기도 연천에서 은거 중이던 미수 허목(穆) 또한 이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영수라는 이유로 삭탈관직되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때 관직을 돌려받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이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장희빈) 소생을 세자로 정하는 문제와 관련 송시열 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극렬 반대하다 모두 축출된 사건. 이 사건으로 남인들이 다시 정계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