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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허씨(陽川許氏) ◈ 시조 : 허선문(許宣文)
한국의 허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 왕비로부터 비롯되었다. 왕비는 인도의 야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때 큰 배에다 파사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 부인당(夫人塘)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을 갖추고 맞이해 비(妃)로 삼았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이다. 선문(宣文)은 공암현(孔巖縣)에 대부호(大富豪)로써 살았으며, 이 때는 후삼국이 대립을 하던 시기인데 고려의 태조 왕건이 견훤군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중 군량미가 떨어지고 병마(兵馬)가 매우 피로하여 절대적인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에 공께서 마필과 식량을 내어 줌으로써 왕건은 전쟁에 승리하여 고려건국에 지대한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 공으로 왕건은 공의 충의에 감동하여 의부(義父)로 모시고 공암촌주로 봉하여 공암현을 식향(食鄕)으로 사(賜)하니 이로 말미암아 관적을 공암허씨(孔巖許氏)로 한 것이며 후에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陽川)의 지명 변천을 보면 현재의 한강유역 인근으로서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전성기때에는 장수왕이 다스렸으며 삼국통일후인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전국을 9주5경으로 나눌 때 이전의 양동(陽東) 양서(陽書)가 공암현(孔巖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충선왕 2년에 양천으로 명명 되었다. 이후 많은 지명의 변화를 거치며 조선의 고종 32년에 양천현은 양천군으로 개칭되면서 5개면을 두었고 일제치하인 1914년 3월 행정구역 재편시 양천,통진을 합해 김포군이라 하고 9개면을 두었으며 김포시 고촌면 풍곡리 산87-3번지에 시조 설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후손 공(珙)은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 부(元 傅) 등과 함께「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 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다. 종(琮)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도적(盜賊) 장영기(張永奇)의 난(亂)을 평정 하는데 공(功)을 세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변방의 여진족을 소탕하기도 하였으며 장신(長身)으로 궁마(宮馬)에 뛰어났고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허종(許琮)의 동생(同生) 허침(許琛)은 1475년(성종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세자(世子)의 총애를 받았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珊定 : 쓸데없는 글의 글자와 글귀를 깎고 다듬어서 잘 정리함) 했다. 150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우참찬(右參贊)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친 그는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항상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며 학문(學問)이 깊고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 생활로 주위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한편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욱(頊)은 종(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추대사건에 관련, 원주에 유배된 후 배소(配所)에서 임종하였으나 인조 반정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허씨가문(許氏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미수(眉 ) 허목(許穆)을 빼놓을 수 없다. 엽(曄)은 군자감부봉사(軍資監副奉事) 한(瀚)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과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등의 무죄를 논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슬하에 성(筬)·봉(篈)·균(筠)·난설헌(蘭雪軒) 4 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특히 난설헌(蘭雪軒)은 규수시인(閨秀詩人)으로 이름이 나서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여류(三大女流)]로 꼽혀왔으며 홍길동전의 허균은 모르는 이가 없을것이다. 엽(曄)과 함께 4자녀는 강릉의 5문장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조선(朝鮮)의 봉건적 사회제도(社會制度)에 개혁(改革)을 부르짖은 사회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로 유명한 균(筠)은 서얼을 차별대우하는 당시의[서얼금고법(庶 禁錮法)]철폐와 반계급적(反階級的) 평등사상을 주장하여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에 있어 근대화(近代化)의 시발점을 이룬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목(穆)은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워 당대의 석유(碩儒)인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었던 이름난 학자로 학문(學問)·문장(文章)·그림·서예(書藝)에 뛰어났으며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은 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하게 했으며,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 명의(名醫)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준(浚)은 16년의 긴 세월 동안 연구 끝에 25 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韓醫學)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현대까지 의성(醫聖)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니 우리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가문을 가장 빛낸 대표적인 위인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 문중인물 ] 편을 참고 하세요. ☞ 집성촌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독정리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지전리, 퇴탄리 경기도 파주군 고하면 일원 평북 구성군 동산면 남산동 충북 청원군 부용면 일원 평북 구성군 사기면. 방현면 창동 전북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전남 승주군 해충면 일원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일원 함북 학성군 학서리 일원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1리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상삼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쌍동리 함북 길주군 덕산면. 장백면. 양사면 일원 * 태자태보(太子太保) : 동궁의 종1품 벼슬 * 수국사(修國史) : 사관의 벼슬(감수국사의 다음으로 2품이상이 겸임) * 첨의중찬(僉議中贊) : 첨의부와 도첨의사사의 종1품 벼슬 * 궤장(궤杖) : 나라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 * 기로소(耆老所) :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위해 마련한 경로당 * 서얼(庶孼) : 첩의 자손 * 신원(伸寃) : 원통한 것을 풀어줌 * 능창군(綾昌君) :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 |